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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프랑스인 루이 파스퇴르

by 내성적인 윤슬 2023. 7. 4.

루이 파스퇴르의 생애

루이 파스퇴르의 아버지는 무두장이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학교 선생의 추천을 받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향수병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22살에 재입학하여 교원 시험에 합격하였고, 그대로 중학교 물리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들의 만류로 대학에 남아 학위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27살에 화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아내와는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했습니다. 이후 계속해 화학을 연구하여 결정의 모양, 분자구조, 편광 효과가 서로 관련됨을 증명하여 명성을 얻었고 생물만이 광학적 비대칭 화합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정립해 분자비대칭연구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열쇠가 됩니다.
그가 릴 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을 지내고 있을 때 인근의 한 양조업자가 술이 변질되는 문제로 파스퇴르를 찾아오며 생물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당시에는 효모가 당을 알코올로 바꾸는 촉매라는 것까지는 알려졌지만, 그 원리는 화학반응으로 잘못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학자인 파스퇴르에게 술이 간혹 시큼하게 변해 버리는 원인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파스퇴르는 술통에서 채취한 표본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그 모양이 예사 경우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변질된 술통에서 발견된 다른 모양의 것, 그것은 바로 세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균을 편광기로 분석하여 생물이라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당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미생물이나 구더기 같은 생물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 이래 그런 미생물 또한 자연발생한다고 생각했으나, 파스퇴르는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생물속생설을 입증하였습니다. 다만 완벽한 입증은 아니었으며, 이후 제자인 틴달과 사위인 샹 뼈를 랑이 각각 간헐살균법과 오토클레이브를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보완되게 됩니다. 그는 '이 연구로서 자연발생이라는 교리는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이로서 이런 다양한 미생물을 가리키는 균(ger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파스퇴르는 연구 끝에 저온살균법을 개발했으며, 오늘날 술, 우유 등에 사용되고 있다. 파스퇴르의 이름을 따 '파스퇴르 공법'(pasteurization)이라고 하며, 저온 살균 공법이 아니라 그냥 살균된 것도 '파스퇴르화'(pasteurized)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는 멸균을 의미하는 sterilization이 아닌, 병을 일으키거나, 식품의 변질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미생물을 적당히 제거하는 것을 pasteurization이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온 살균된 식품들의 경우 ultra-pasteurized라고 표기된 경우가 많습니다.
맥주의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고, 양조의 화학적 과정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하며 프랑스 맥주 양조 기술이 잠시나마 독일을 앞서게 되는 성과를 낳았습니다. 다만 정작 파스퇴르 자신은 맥주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발견 이후 난데없이 뇌출혈로 쓰러져, 죽을 때까지 몸의 왼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좌반신 불구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에 좌절하지 않고 연구 활동을 계속합니다. 이때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균 배양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원인균을 배양했다면 그 병을 이길 수 있는 약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이 천지였습니다.
1880년에는 닭 콜레라에 대해 연구하던 중 조수가 실험체인 닭에게 콜레라균을 주입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휴가를 다녀온 후에야 콜레라균을 접종했습니다. 그런데 닭들은 시름시름 앓는 듯하더니 곧 건강해졌고, 이를 알게 된 파스퇴르는 여러 단계의 실험을 통해 휴가철 동안 방치된 콜레라균이 약해진 채로 접종되어 닭들이 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1881년 5월 5일 공개적으로 양들에게 탄저균 백신의 접종이 실시되었고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다만 아직 실험 단계여서 그런지 백신의 평균적인 품질이 보장되지 않아서, 오염되거나 순도가 떨어지는 백신이 접종되어 되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있어 논란이 되었습니다.
1885년에는 광견병 관련 연구로 또다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드높이게 됩니다. 조제프 메스테(Joseph Meister, 1876~1940)라는 9살 소년이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서 어머니가 파스퇴르를 찾아왔는데, 당시 그는 광견병 백신을 연구하여 동물실험에 성공한 단계였으나 아직 사람에게는 시험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광견병은 의학이 발달한 현재도 즉각 백신을 투여받지 않으면 치사율 100%인 극히 위험한 병인데, 당연히 당시에는 그냥 죽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에게 백신을 접종했습니다. 그리고 조제프는 운 좋게도 광견병을 이겨내고 면역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광견병 백신 또한 절찬리에 생산되었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1888년 11월 14일에는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세웠습니다.
1895년 만 72세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파스퇴르 연구소 지하에 있다고 합니다. 석관묘로 조성되어 있으며 석관 안에 파스퇴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루이 파스퇴르의 일화

 

누에에게 발생하는 미립자병과 연화병의 퇴치법을 발견하여 프랑스의 양잠업계를 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파브르를 만나기도 했는데, 정작 파브르는 파스퇴르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파스퇴르가 누에의 병을 고치는데 도전한다는 열의는 높이 샀으나, 파스퇴르의 태도가 워낙 거만했기 때문입니다. 파스퇴르는 유럽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당대 최고의 잘 나가는 과학자 중 한 명이어서 '내 연구를 이해 못 하는 것은 당신이 멍청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코앞에서 서슴지 않고 했다고 합니다. 또한, 파스퇴르는 파브르에게도 와인 저장고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파브르는 자신은 가난해서 따로 저장고가 없다고 하자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어느 날 제자가 그렇게 배운 게 많으신데 그리 신앙심이 깊을 수 있냐고 묻자 파스퇴르는 자신은 오히려 많이 배워서 마치 농부처럼 믿음이 깊고, 만약 아는 게 더 많았다면 농부의 아내만큼 믿음이 깊었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과학자의 이름을 따온 실험기구로 파스퇴르 피펫(스포이트)이 있다.

훌륭한 과학적 업적과 달리 개인적으로는 만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정도로 그 누구 앞에서도 거만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죽을 때까지 모난 성격을 가지고 살았으면서도, 세균과 위생에 집착하고, 평생 우울증으로 고생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딸아이 5명 가운데 3명, 장녀 잔느는 9살. 둘째 딸 세실은 13살, 막내딸 카밀은 2살에 요절했습니다. 이 셋은 파스퇴르가 제일 활동이 활발할 때 병에 걸렸고, 위독했을 때는 이미 멀리 출장을 가 있어서 딸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아들인 장 바티스트(1851~1908)나 마리 루이제(1858~1934), 이 2명은 무사하게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지만 장 바티스트는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어 직계는 단절되었습니다. 대신, 마리 루이제는 1남 2녀를 낳았습니다. 손자인 루이스 파스퇴르 발레 라도트(Louis Pasteur Vallery-Radot,1886~1970)가 의사 및 파스퇴르 전기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손자, 손녀들도 자식들이 없어서 파스퇴르 핏줄은 끊어졌습니다.

파스퇴르로 인해 인류 최초로 광견병 접종을 맞고 살아난 메스테르는 이후 평생 파스퇴르 연구소 관리인으로 일했습니다. 메스테르는 1940년 자살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게 파스퇴르의 석관을 깨네 시신을 훼손하려는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가 자살했다고 잘못 알려졌습니다. 심지어 이게 90년대 초반 어린이 과학서적이라고 나온 것에도 이렇게 서술되었습니다. 실제로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인해 가족들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고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절망해 자살했는데, 안타깝게도 죽은 줄 알았던 조제프의 가족은 그 뒤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생명은 모든 단계에서 죽음을 지휘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딸 3명이 모두 장티푸스로 죽었기 때문에 감염병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발효처럼 감염과 염증도 미생물에 의한 거라는 직관을 가졌으나 의사가 아니라서 임상적 연구를 할 수 없어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다 영국의 의사 조지프 리스터가 파스퇴르의 연구를 참조하여 석탄산을 이용한 외과수술 전후에의 소독법을 확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