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그레이엄벨
알렉산더 그레이엄벨은 1847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든버러대학교를 나온 뒤, 런던대학교에서 의학을 연구하였습니다. 헬름홀츠의 음향학(音響學) 연구에 뜻을 두고, 1870년 아버지 A. M. 벨(1819∼1905:시화법의 창시자)과 함께 캐나다로 건너갔습니다. 1871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음성의 메커니즘에 흥미를 느끼다가 전기통신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화술(話術) 교육가인 아버지를 이어 보스턴에서 농아학교를 경영하였으며, 1873년부터는 보스턴대학교의 음성생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1876년 자석식 전화기의 특허를 받았는데, 이 전화기는 송수화기가 모두 전자석의 극(極) 근처에 있는 엷은 철판을 진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음성이 진동판을 진동시키면, 유도전류에 의하여 수화기 끝에서 음성이 재생됩니다. 이를 토대로 1877년 벨전화회사를 설립하였으며, 또 전화기 발명으로 받은 볼타상(賞)을 기금으로 볼타연구소를 창설하여 농아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밖에 1880년 광선전화의 연구, 1887년 축음기의 개량, 비행기의 연구, 《사이언스》지(誌)의 창간 등, 여러 방면의 업적을 남겼으며, 1882년 미국에 귀화하였습니다.
한편, 종전까지 벨이 전화 발명자로 알려졌으나, 최초의 발명자는 이탈리아의 발명가 안토니오 무(Antonio Meucci, 1808~1889)입니다. 무치가 자석식 전화기를 발명한 뒤 특허를 내기 위하여 웨스턴유니언전신회사(Western Union Telegraph Company)와 의논하는 동안 설계도와 전화기 모델을 잃어버렸고, 이후 벨이 무치가 발명한 것과 비슷한 전화기로 특허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무치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하고 맙니다. 2002년 6월 미국 의회는 무치를 전화 발명자로 공식 인정하였습니다.
전화기의 발명?
한동안 실용적인 전화기의 최초 발명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조사 결과로는 다른 발명가들의 특허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전화기 시제품을 최종 정립한 사람은 안토니오 무치이며, 그 외에도 필립 라이스라는 교수가 전화기의 원리를 정립했고, 한때 벨보다 2시간 특허가 늦어 등록하지 못했다고 알려진 엘리샤 그레이 역시 전화기 개발의 선구자였다는 것도 알려졌습니다.
안토니오 무치는 자석식 전화기를 발명한 뒤 특허를 내기 위하여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Western Union Telegraph Company)와 의논하고 브리핑했지만 그 과정에서 설계도와 전화기 모델을 도난당해서 특허가 무효처리되었습니다. 이후 벨이 무치가 발명한 것과 비슷한 전화기로 특허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무치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돈이 없어 국선 변호사도 선임할 수가 없었고, 패소하였습니다.
안토니오 무치보다 훨씬 빠른 1837년에 이미 전화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는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1837년의 세일럼의 물리학자 겸 내과 의사였던 찰스 페이지는 전자석에 의한 소리 방출과 전류 방해속도에 따른 소리 변화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이 결과에 바탕을 두고 1854년에 벨기에의 샤를 부르셸이 프랑스 잡지인 일러스트라시옹에 자신이 창안한 생각을 기고했는데, 그 내용은 장거리 통신 방식과 금속판 진동을 통한 진동과 배터리의 전류 변화를 통한 음성전달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이론들을 합쳐서 1858년에 필립 라이스(Johann Philipp Reis)라는 독일인 교수가 최초의 전화기라 할 수 있는 DAS TELE PONE을 만들었고, 1863년까지 꾸준히 개선을 실시했습니다. 더구나 이미 1886년 기록에 따르면 벨은 이미 10대 시절에 1862년에 이미 에든버러의 공작소에서 이 제품을 직접 구매까지 했고, 1876년 특허 신청 직전인 1875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조셉헨리의 연구실에서 이 모델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 라이스의 전화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전화 관련 특허 소송과 1885년 벨의 특허 무효 조사가 있었을 당시에 라이스의 전화기 시제품은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기에 무효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2003년 9월 영국에서 기록이 나왔는데 1930년대에 런던과학 박물관에서 실험을 했을 때 필립 라이스의 전화는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박물관 사정이 열악해 박물관과 제휴한 스탠더드 텔레폰 케이블 사는 사업 파트너였던 벨 전화회사의 후신인 AT&T의 눈치를 살펴 보고서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굴욕 때문에 필립 라이스의 묘비에는 "전화의 진짜 발명자 필립 라이스"라고 적혀 있습니다.
산용액을 이용한 음성전달이라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실험 아이디어는 도둑질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벨은 18세에 헬름홀츠의 소리굽쇠 측심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독일어 실력이 부족했던 벨은 배터리가 소리를 전신선으로 전달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70년에 영국을 떠나면서 착각을 알게 되었는데, 이러한 벨의 착각은 1928년 출간된 벨의 조수인 캐서린 맥켄지가 쓴 전기에 자세히 나와 있었습니다. 의혹이 제기된 것은 벨의 노트에서 2주가량의 공백이 있은 뒤 갑자기 배터리가 아니라 산 용액을 통한 실험이 나타났다는 사실에서였습니다. 그것은 1876년 3월 10일에 실험에 성공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정작 벨은 2월에서 3월 초순까지 워싱턴 D.C. 에서 로비를 벌이고 있었고 여기서부터 벨의 사기행각이 시작됩니다.
벨의 사기극을 밝힌 가장 큰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벨의 실험노트였습니다. 그는 2월 14일에 특허를 신청했는데, 기이하게도 당시 상원에서는 발명품을 제시하지 않아도 되는 입법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3월 7일에 연구실로 돌아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특허권이 3주 만에 나오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로써 1876년 3월 2일에 벨과 같은 보스턴에 기반을 둔 티머시 스테빈스는 유압 엘리베이터에 대한 특허를 요청했으나 5개월이 지난 8월 15일에 처리되었고, 뉴 헤이번의 윌리엄 게이츠는 1874년에 요청한 특허가 1876년까지도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2월 19일에 특허 심사관은 벨에게 특허가 3개월간 보류될 것을 통보했었습니다. 심사관은 3개월 뒤에 우선적으로 심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으나 1877년 에밀
베를리너의 마이크 특허는 우선권을 부여받은 결과 13년 만에 특허를 얻었습니다.
빠른 특허가 나온 것은 벨과 완전히 동일한 특허를 신청한 과학자 엘리샤 그레이(Elisha Gray)의 전화기와 실험보고서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샤 그레이는 빈손으로 찾아온 벨과 달리 2월 14일에 전화기와 보고서를 들고 특허를 신청했고, 거기서 그레이의 발명특허권 보호 신청서 3페이지에는 벨의 노트에 그려진 것과 똑같은 실험 기구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벨이 전화연구 특허를 훔쳐서 등록할 동기도 충분했습니다. 벨의 연구는 진전이 없었고, 집주인과 후원자들의 압박. 거기에 후원자 겸 부인이 될 메이블 허버드의 아버지인 가디너 허버드는 교사 노릇을 그만두지 않고 전신기 개발에 주력할 것을 결혼 여부를 두고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벨이 3월 10일에 가서 아래의 날조되다시피 한 실험일화를 만들 때 이미 그레이는 1개월 전에 모든 실험기구와 보고서를 제시했습니다. 벨의 조수 왓슨이 그레이의 연구실에 자주 간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벨은 그레이의 아이디어와 실험을 모두 베껴서 정치 로비를 통해 특허를 강탈한 것입니다. 당시 특허 심사관이었던 세나 피스크 윌버는 벨의 특허를 맡은 법률회사의 동업자인 마셀러스 베일리에게 빚을 지고 있었는데, 베일리의 요구로 윌버는 벨의 특허 서류가 먼저 도착한 것으로 고치고, 1876년 2월 26일에는 아예 베일리의 협박으로 그레이의 특허 도안과 전파
송수신 방법을 벨에게 모두 공개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당시에는 윌버가 알코올 중독자였고, 자주 진술을 바꿔서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으나, 최종진술서의 원본을 피해자인 엘리샤 그레이에게 보내었고, 자신의 진술이 취해있든 아니든 진짜임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이후 벨은 이러한 의혹을 적극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 벨과 그의 아내 메이블이 사위인 길버트 그로스가 쓰고 있는 벨의 전기에 쓰일 원고를 보냈는데, 거기서 벨은 윌버의 진술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자신은 그레이의 서류를 전혀 보지 못했고, 윌버가 1876년 2월 14일에 그레이와 자신의 특허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한 단락을 보여주었다면서 그 단락을 인용했습니다.
이는 벨 자신이 실험한 3월 10일 이전에 2월 14일에 그레이가 실험한 내용의 핵심 비밀을 사전에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미 1877년 당시에 그레이는 벨이 시카고 트리뷴 지에 기고한 기사에 대해 철회를 요구했는데, 당시 벨은 특허 관련 문서가 공개되기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에게 "당신의 특허내용이 뭔지는 모르지만, 액체에 전선을 담가 소리를 전달하는 방식인 건 안다."라고 핵심내용을 알고 있음을 실토했습니다. 특허 관련문서가 공개되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특허기밀문서를 확인했다고 자백한 셈입니다.
또한 벨의 특허 신청서 원본 사진을 보면, 벨의 특허의 핵심인 가변저항 개념은 본문이 다 이 쓰인 뒤에 서류의 여백에 덧씌워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1915년 영국의 엔지니어인 존 킹스베리는 "발명가가 자신의 발명품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핵심요소를 마지막 순간까지 빠뜨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라고 일침을 가했고, 20년 뒤에 윌리엄
에이트겐도 벨의 신청서의 본문에 가변저항 개념이 빠진 것을 '주인공 없이 희곡을 쓰는 짓'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조지 브라운을 통해 1876년 1월 29일에 영국에 특허 신청을 먼저 내려고 했는데, 이미 1월 26일에 조지 브라운을 만난 벨은 자신의 특허 신청 서류의 사본을 제시했는데, 이후 이 사본은 1878년에 다우드 소송 때 벨의 법무팀이 가져간 이후 다시 등장하지 못하다가 1885년에 재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원본이라 할 수 있는 특허 서류에는 벨의 액체 송수신기 개념과 가변저항 개념이 일절 없는 다중 전신기에 대한 내용만이 존재하고, 마지막 문장에 가서야 소리, 혹은 소음을 전달할 수 있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서류는 이후에 증거 및 소송 관련 서류로 제기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레이가 벨이 자신의 액체송수신장치의 연구를 훔친 것을 안 것은 후에 벨이 전자석송수신 장치를 개발하고 난 뒤였는데, 액체송수신장치 특허가 없었다면, 전자석송수신 장치 개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웨스턴 유니언사가 그레이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를 두고 위인전이나 과거 기록에서는 웨스턴사가 벨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벨이 잘 되는 걸 보고 그레이를 꼬드긴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기록되었지만, 이미 1872년에 그레이는 자신의 회사를 웨스턴 유니언사와 제휴해 웨스턴 일렉트로닉스로 개칭하여 협력업체로 자리 잡았고, 1876년에는 벨의 조수인 왓슨이 자서전에서 밝혔듯이 미국의 주요한 전기회사로 자리 잡은 상태였습니다. 즉 계열사의 소송문제에 본사까지 끼어든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비열한 방법으로 특허권을 따내 1877년 미국전기전신(American Telephone & Telegraph)을 설립하였으며, 이 발명으로 받은 볼타상을 기금으로 볼타연구소를 창설하여 농아교육에 전력을 가했습니다. 그 밖에 광선전화의 연구 외 여러 방면에서 업적을 남겼습니다.
시험용 전화기로 연구하다가 조수인 토머스 왓슨에게 전화로 "왓슨, 이리로 좀 오게!"라고 통화했고,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전화 통화라는 에피소드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화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이 부분은 여러 인물들, 특히 조수들의 기록에서는 나타나지만, 벨의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왓슨을 부른 이유가 황산 내지는 산용액을 쏟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실험에 산 용액이 쓰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산용액을 통한 송수신장치는 바로 그레이와 벨의 지루한 특허전쟁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벨은 전자석을 통한 송수신장치를 만들면서 사실상 산용액을 이용한 송수신 장치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왓슨은 이후 특허소송 과정 외에도 전자석송수신 장치 발명에도 관여해 여러 실험을 같이했고, 말년에 벨과 같이한 실험들과 인생에 대한 자서전을 남겼습니다. 벨의 아이디어가 기록된 벨의 연구노트는 1974년까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에 가족소유물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벨의 사후 1974년까지 딱 1명의 역사학자만이 이것을 열람했습니다.
이후에 미국 의회로 이관되었으나 이후에도 딱히 열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에 와서야 이러한 연구들이 시작되었습니다.
2002년에 6월 미국 하원은 안토니오 무치를 전화 발명자로 공식 인정하였습니다. 완벽히 최초 발명자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전화기 발명에 공헌하고 시제품을 정립한 발명가로 등록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무치를 비롯하여, 필립 라이스와 엘리샤 그레이를 비롯한 여러 발명가들의 전화기 발명 기록들도 공식 기록으로 등록했습니다. 그러나 상원에서는 2003년에 부결되었습니다.
전설의 벨 연구소
당시 벨은 전화의 발명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1880년에는 '전화의 발명'을 업적으로 볼타 상과 그 상금 5만 프랑을 받았습니다. 이 상으로 벨은 볼타 연구소(혹은 벨 연구소로도 불림)를 세웠고 소리와 관련된 연구(소리 분석, 녹음, 전송 등)를 하게 됩니다. 다만 이 연구소는 이름만 비슷할 뿐 잘 알려진 AT&T 벨 연구소는 아닙니다. 벨의 손길이 닿아있다는 것과
소리라는 연구 소재는 비슷했습니다.
이후 시간이 좀 더 흘러 벨은 1883년경에 AT&T를 설립했고, 지금 잘 알려진 벨 연구소는 AT&T와 웨스턴 일렉트릭이 공동출자하여 1925년에 설립했습니다. 당시 이름은 벨 전화 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ies)였고 당연히 모회사가 전화회사다 보니 전화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연구하다 보니 전기전자, 통신, 컴퓨터에 관련된 온갖 업적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전파망원경의 기초가 되는 우주에서 전파가 날아온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이 연구소였고, 발명은 이미 되어있었지만 팩스의 실용적인 시연도 벨 연구소가 처음이었습니다. 당연히 유선 전화를 넘어 TV, 무선망에 대한 업적도 다양하게 나왔으며 TDMA와 CDMA 등의 특허도 벨 연구소에서 나왔습니다. 레이저의 발명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현대 컴퓨터 공학에서는 빼려야 뺄 수가 없는 곳인데, 트랜지스터를 포함한 다양한 반도체 기술, C 언어도, 샤논의 정보 엔트로피 개념도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C의 용도가 UNIX를 만들기 위한 언어였으므로 UNIX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아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적인 기반 중 수많은 부분이 이곳 연구소의 결과물에 기반합니다. 단적으로 이 연구소 출신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13명, 튜링 어워드 수상자가 4명이나 존재합니다. 그야말로 현대 전자, 전기, 통신, 컴퓨터 공학의 기틀을 세운 곳입니다. 어떻게 보면 벨의 진정한 업적은 이 연구소의 설립(에 영향을 준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15년 노키아가 벨 연구소의 지분을 확보하고 2016년 1월 14일부로 벨 연구소는 노키아 벨 연구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AT&T 벨 연구소 시절에 쌓은 업적이 무지막지하다 보니 벨 연구소하면 AT&T 연구소로 아는 사람들이 아직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