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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갈릴레오. 그래도 지구는 돈다!

by 내성적인 윤슬 2023. 7. 6.

생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피사의 몰락 귀족인 피레네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1520~1591)는 의류 교역업자이자 음악이론가이기도 했는데,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종종 지적 권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성격은 아들 갈릴레오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갈릴레오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그가 태어났던 때는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갈릴레오는 10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했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생활했습니다. 그는 수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갈릴레오가 보수가 많은 직업인 의사가 되기를 원했고,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피사 대학으로 보냈습니다. 여기서 갈릴레오는 의학보다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경제적 궁핍함으로 인해, 4학년 때 대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1585년 피렌체로 돌아가 개인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습니다. 갈릴레오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몇몇 대학에 편지를 보냈고 결국 피사의 모교에서 수학 교수직을 제안받았습니다. 대신 보수는 형편없었습니다.
피사 대학에서의 교수 계약이 끝나자, 갈릴레오는 다시 심각한 재정 곤란에 빠졌습니다. 159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그에게는 가족들을 부양할 경제적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여동생들이 결혼하여 출가하자, 갈릴레오는 자신이 몇 년 동안 모아둔 월급을 탈탈 털어서 혼수를 준비해줘야 했습니다.
1592년 갈릴레오는 파도바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18년 동안 재직하며 기하학, 천문학, 군사기술 등을 가르치며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부양할 가족들이 갈수록 늘어났기 때문에 그의 경제적 궁핍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해 유럽 전역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개인 지도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중에는 피렌체의 지도자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도 있었습니다.
1609년 갈릴레오는 당시 막 개발되었던 망원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망원경의 개량에 착수했고, 자신이 개발한 망원경을 가지고 1609년 후반부터 1610년 초에 걸쳐 밤하늘을 관찰하면서 인류 최초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했습니다.
이 발견은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기존 관념을 깨부쉈습니다.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과 그 밖의 발견들을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이 책은 쉽게 구성되었고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무려 550쇄까지 인쇄되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토스카나 대공국의 제4대 대공인 코시모 2세에게 헌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메디치 성'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는 토스카나의 메디치 궁정의 막강한 후원을 얻기 위한 계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면서, 드디어 갈릴레오는 진저리 나는 대학 체제에서 벗어나 엄청난 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1611년, 로마에 도착한 갈릴레오는 교황 바오로 5세를 접견했습니다. 교황청은 이 저명한 학자를 환영했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했습니다. 교황을 접견하는 이는 누구라도 교황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교황은 그 전통을 깨고 갈릴레오를 무릎 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황청의 주도 세력이었던 예수회 또한 갈릴레오의 주장을 지지했습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곳에서 강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대세력도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오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었습니다. 개중에 토마소 카치니라는 도미니코회의 수도자는 종교재판소에 갈릴레오를 이단 혐의로 고발하기까지 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조사에 착수했지만 카치니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판결한 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단,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갈릴레오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시했습니다.
갈릴레오도 이런 분위기를 알았습니다.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적 철학자들을 피상적이며 불성실한 종교적 열성을 가진 천박하고 저속한 저자로 공격했습니다.
토마소 카치니가 갈릴레오를 공격하고 1년 뒤,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향했습니다. 자신을 방어하고,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개인적으로 로마 당국에 설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는 이 당시 로마의 분위기가 갈릴레오의 1차 방문 때와는 달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해 교황청은 '새로운 것'에 민감한 상태였고, 갈릴레오의 주장이 물리학과 수학의 한계를 넘어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자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든다고 여겨 그를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갈릴레오는 침묵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논쟁을 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교황청은 모든 《성경》해석에,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교황청의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행동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개인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개신교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성경》을 코페르니쿠스의 가설과 일치할 수 있도록 재해석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은 교황청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벨라르 민 추기경은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권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만두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수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공공연히 가르치고 옹호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이윽고 1624년 봄, 새로운 교황인 우르바노 8세의 즉위 축하식에 참여하기 위해 갈릴레오는 다시 로마로 출발했습니다. 우르바노 8세는 예전부터 갈릴레오와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새 교황과 갈릴레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갈릴레오가 환대를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메달 2개와 그림, 그리고 아들 빈센초를 위한 교회 장려금을 포함한 많은 선물을 교황으로부터 받고 로마를 떠났습니다.
《천문 대화》를 저술했으나 6개월 만에 발행을 금지당했고 끝내 1632년 9월 23일,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의 망명도 고려했으나 결국 출석을 결심하고 1633년 2월 로마에 도착, 최종 판결을 6월에 받았습니다. 그는 혐의를 인정하면서 그때껏 연구한 것과 정반대로 지동설을 비난했고, 교황청은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해 감금령을 내렸지만 건강이 나쁘고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곧 가택연금으로 감형을 받았습니다. 금고형으로 3년을 지냈는데, 한 번은 위에서 언급된 토스카나 대공의 저택에서 지내다가, 후에 시에나 대주교의 자택에서 손님으로 지내다가 다음엔 피렌체 근처의 아르체트리라는 작은 시골에서 국가 연금을 받으면서 평온하게 연구에 전념하며 살았습니다.
늘그막에는 노환으로 실명이 되었는데 1642년 1월 8일, 찾아온 두 제자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지 않나 하여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대로 숨을 거둬서, 제자들과 나누던 평범한 대화가 유언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토스카나 대공은 갈릴레오를 기리기 위해 산타크로체 성당 본당에 묻고 성대한 기념비를 세워주려 했지만,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평범한 시민으로 부속 성당에 묻을 것이며, 아무런 허례나 예식을 갖추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업적

아이작 뉴턴이 말하길, "내가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봤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그 거인 후보 중에서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특히 유일무이하게 뉴턴에게 관성에 대한 힌트를 주는 논문을 쓴 사람입니다. 우연히도 갈릴레오는 뉴턴이 태어나기 바로 전 해에 사망했습니다.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로 보는 건 아이작 뉴턴에 의해 고전물리학이 성립된 이후의 사후적 평가입니다. 당대에는 저명한 수학자였으며, 직업면에서도 수학자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당시에 수학자는 천상이자 논리의 학문인 천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되었고, 이에 갈릴레오의 업적은 직업면에서는 평가하자면 이런 경향에 반대하여 수학적으로 천문학의 원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동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저서인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종교 권력에 대항한 과학의 순교자 정도로 잘못 인식되곤 하는데, 여기에는 왜곡과 과장이 있습니다.
유명한 일화로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통념을 깨기 위한 것으로,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를 동시에 낙하시켜서 두 추가 동시에 지면에 떨어지는 것으로 증명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갈릴레오가 한 실험은 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고도의 사고실험이었습니다.
만약 무거운 물체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면,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떨어뜨리는 경우를 고려해 본다면,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려 하고 가벼운 물체는 그보다 늦게 떨어지려 할 것이므로, 그 결과는 처음의 무거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늦고, 가벼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빨리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물체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전체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서 더욱 빨리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도 나옵니다. 하나의 가정에서 이처럼 상반된 두 결론이 나왔으므로, 그것은 애초의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동시에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사고실험만 한 것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갈릴레오는 기다란 판자에 홈을 만들어 놋쇠의 철구를 굴려 낙하에 필요한 시간을 측정하여 이론에 대한 실험근거를 제시했습니다. 다만 과학사학자 버너드 코헨은 "시간 측정을 자기 맥박으로 했다"면서, "이 실험은 갈릴레이가 실험 결과를 사전에 얼마나 확고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험에 있어서 누구나 가설을 세우고 기대한다는 점과 그때 '초단위'로 시간을 잴 수 있는 기계식 시계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가 가진 자원을 가지고 실험을 통해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과학적 실험입니다.
훗날 갈릴레오의 이론은 아이작 뉴턴이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미래에 아폴로 15호의 승무원들이 달에서 실험하여 이를 입증합니다.
스스로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찰했으며 목성의 위성 4개를 비롯한 수많은 위성과, 토성 고리의 발견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금성의 위상 변화도 관측했습니다. 당시 파도바 대학교의 수학 교수이던 갈릴레오는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전해오는 상징과 결합시켜 궁정의 후원을 얻었습니다. 참고로 그때 갈릴레오의 연봉은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학계에는 신학/철학/수학으로 나눠지는 일종의 위계질서가 있었습니다. 이중 수학자는 카스트 수준의 하위층으로, 단적으로 말해서 수학 교수는 다른 교수들과 봉급이 8배까지 차이 났습니다. 갈릴레오는 수학 교수였고, 이 때문에 갈릴레오가 발표하는 천문학 주장들은 다른 학자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천문학은 신학/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직 신학자나 철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이라는 고정관념까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얻으려 했고, 결국 "토스카나 대공의 수학자 겸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유명한 건 지동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야기된 여러 상황들 탓에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으며 어쩔 수 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관성을 말한 것도 이 사람입니다. 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지동설을 반박할 때 '만약에 지구가 움직인다면 항상 강한 바람이 불어야 하는데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물체를 떨어트리면 대각선으로 떨어져야 하는데 직선으로 떨어진다.'라고 말할 때, 갈릴레오는 공기와 낙하하는 물체 역시 (움직이는 배에 탑승한 사람처럼) 지구에 종속되기 때문에 항상 강한 바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이런 반박을 재반박하기 위해 관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관련 내용 또한 갈릴레오는 진공에서 움직이는 물체에 힘을 주지 않으면 물체가 스스로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외에도 최초로 온도계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다만 기압 때문에 정확한 온도는 측정하지 못하여 유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요새 건축 능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업적의 한계

당시 지동설이 완전히 인정받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지구가 정말 움직인다면 사람들이 왜 그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어서였습니다. 갈릴레오도 여기에는 대답하지 못했고, 저서에서는 그저 천동설 지지자를 바보 얼간이라는 식으로 조롱하는 것으로 일관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가 제자리에서 점프하면 왜곡된 궤도로 움직일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갈릴레오는 '너는 움직이는 함선에서 점프하면 다른 곳에 착지하니?'라는 정도의 말만 했을 뿐 과학적으로 이를 설명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밝혀진 모든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갈릴레오가 발견한 과학적 사실들로부터 추론한 지동설이라는 결론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닙니다. 뉴턴도 아인슈타인이 나오고 나서 그의 이론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뉴턴의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또한 갈릴레오는 밀물/썰물이 달의 인력 때문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매우 황당하게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갈릴레오가 저지른 오류들은 후대에 아이작 뉴턴이 고전물리학을 정립하고 나서야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주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동설의 증거는 연주시차가 될 수밖에 없는데 당시 관측 장비로는 이 미세한 차이를 잡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지동설도 천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설명하진 못했는데, 이는 행성들이 원 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를 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오류는 결국 나중에 케플러가 해결했다. 무엇보다도 갈릴레오는
'왜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함이 합당한가'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합리적 설명을 하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에 의거하여, 천체는 에테르라는 지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보았고, 지상계와는 전혀 다른 논리체계를 적용해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서 지상계의 먼 곳을 관찰해 보니,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흡사했습니다. 아마도 천상계 역시도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라고 했을 뿐, 어째서 망원경으로 관찰한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흡사한지 논리적으로는 입증할 수 없었다. 다만 이러한 사례가 갈릴레오의 의미를 절하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오가 재판장에서 나가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이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가 이런 말을 하여 남들이 들어서 후세에 남기도록 했을 가능성은 낮고, 후대의 창작으로 보입니다. 
다만 요하네스 케플러와 주고받은 편지를 봤을 때, 자신의 발표가 천동설 지지자들을 자극할 것으로 예상한 듯합니다.